정영은 작가의 <나뭇가지>를 보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집니다. 나뭇가지, 그리고 나뭇가지를 쥐고 있는 손이 보이고 그 아래 떨어진 나뭇잎이 보입니다. 이건 그림에 그려진 대상에 대한 묘사이겠죠. 정말 나뭇가지를 쥐고 흔들어서 잎이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현상을 그린 그림이겠죠. 그런데 왜 이 그림을 보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졌을까요?
저는 이 그림에서 서정을 발견합니다. 기억 저편에서 비슷한 경험을 찾아냈을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그림이 그 기억에 대한 삽화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제 마음이 움직인 배경에 대해서 이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다다른 제 고민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저는 장애미술이 장애미술로 드러나야 하는가에 대해 늘 고민합니다. 특히 발달장애 미술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설명에서 반복되는 비평의 개념(비평이 정말 존재한다면)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저조차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표현 방식, 집요하게 반복적으로 드러나는 패턴, 동식물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처럼 포개어지는 몇 가지 비평의 패턴을 발견하곤 합니다.
작가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작업 태도를 발전시켜 나아가고 있습니다만, 비평이 설 시각의 지대는 여전히 협소합니다. 무관심에서 비롯함이 크겠죠. 다시 정영은 작가의 <나뭇가지>로 돌아가서 말씀드릴게요. 저는 이 작품에서 장애/비장애 사이의 바(/)를 찾지 못합니다. 순수란 무엇일까 싶으면서도 이 작품이 순수히 오롯하게 보입니다.
언젠가 저는 “장애미술비평임이 드러나야 하는가, 아닌가라는 자문에 대해 ‘현재적’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선택적’ 수용, ‘선택적’ 접근, ‘선택적’ 선취. 필요하면 드러내고, 필요하지 않으면 드러내지 않아도 좋다”라고 적은 바 있습니다. 정영은 작가의 작품에서는 이 선택이 불필요해 보입니다. 작품 자체만으로도 미적인 쾌감이 있지 않나요? 제 고민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독립큐레이터 김현주-